안녕하세요, 최창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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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958년 전형적인 농촌마을인 경북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마을 앞을 도도히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꿈을 키웠고,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 그리고 5명의 누나와 1명의 여동생 등 다양한 가족 구성원 속에서 듬뿍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였습니다. 1970년대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강폭도 좁아지고, 수량도 많이 줄었지만, 어린 시절 저에게 있어서 낙동강은 큰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농업협동조합장으로 재직하시던 아버지께서는 저의 삶에 있어서 늘 엄격하면서도 든든한 정신적 모델이 였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저의 이름을 昌學이라고 지으실 만큼 교육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가지신셨던 분이셨고, 지역사회의 지도자로서 존경받는 분이셨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신풍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약2개월간 왕복10Km의 산길을 걸어서 다녀야 하는 지보중학교를 다니다가 대구에 있는 대륜중학교로 전학을 하게 되었으며,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자상하신 이모부님과 이모님의 보살핌 아래 동갑내기인 이종사촌과 함께 이모님 댁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중학교 시절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학년 여름방학 숙제로 제출한 식물채집이 전교에서 가장 우수하여 교장선생님으로부터 표창을 받았으며, 과제물은 약 1개월간 학교에 전시가 되었던 일이였습니다. 이는 제가 시골출신으로서 방학을 이용하여 온 산과 들을 돌아다니면서 자료를 채집하고, 식물도감 등 전문서적들을 참조하여 표본을 만들었고, 설명서를 작성하였기 때문입니다. 시골 출신으로서 큰 상을 받은 후 도시 학생들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이후 친구들과 도시생활에 빠르게 적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시절 시골에서는 매우 우수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도시로 전학을 한 후 도시 학생들과는 상당한 학력차이가 있음을 알았고, 이를 극복하고자 부단히 노력하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정말 힘드는 일이 였습니다. 그 결과 1학년말에는 전과목 평균성적이 1학기보다 크게 향상되어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진보상’을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자신감을 회복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시절 과학과목을 담당하셨던 선생님의 각별하신 관심과 지도로 모형비행기 제작, 모터보트 제작, 광석라디오 제작, 각종 동물해부 실험 등에 많은 활동(수차례 수상)을 하였으며, 문학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져서 한국의 단편문학 작품은 물론, 장편문학에 이르기까지 당시 중학생으로는 보기 드물 만큼 많은 문학서적들을 읽기도 하였습니다. 유난히 책을 좋아하여 어린 시절부터 읽었던 수 많은 책들은 지금까지도 저에게 정신적 자양분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저는 저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가르쳐 주신 아버지께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책만큼 소중한 것도 없다고 생각하며, 저의 자식들에게 어린 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독서의 중요성을 실천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청구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 건강을 위하여 태권도와 유도, 자전거 타기 등 체육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자전거 타기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즐겨하였으며, 저의 주된 이동 수단은 늘 자전거였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저는 1년간의 쓰라린 재수생활을 경험한 후 대구대학교 행정학과로 진학하였습니다. 대학시절 특히 많은 책들을 읽었으며, 행정학과 공부도 열심히 하여 장학생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학 2학년 시절에는 대구대학교 한맥회(전통문화 계승 동아리) 회장을 역임하면서 선후배간 폭넓은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등 활발한 대학생활을 하였습니다. 대학 3학년말에 향후 인생 진로를 대학교수를 목표로 설정하고, 모교에서 대학원을 진학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이후 학자로서의 길을 가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습니다. 특히 대학시절 앨빈 토플러의 미래의 충격, 제3의 물결, 권력이동 등과 존 나이스 비트의 메가트랜드, 피터 드러커의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 등 사회변동과 관련된 책들을 읽으면서 향후 인생관과 세계관 형성에 많은 자극을 받았으며, 행정학을 공부하면서 늘 새로운 정보통신 기술이 기존의 행정체제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사회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어 갈 것인가에 관하여 생각하게 되었고, 이러한 관심은 10여년이 지난 후 박사학위 논문 주제를 한국에서의 분권화와 정보화를 접목시켜 기존의 권위주의적, 집권적 행정체제를 정보화 기반으로 어떻게 개혁해 나갈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춘 것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대학원 입학이후 교수연구실에서 5년간 조교생활을 하였으며, 1984년도 대구대학교 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학위(논문 : 정책결정과정에 관한 사례연구)를 취득한 이후, 가톨릭상지대학교, 대구대학교, 계명대학교, 대구가톨릭대학교, 경일대학교, 경주전문대학(현, 서라벌대학교), 상주대학교(현,경북대학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등에서 15년간 기획 및 공공정책론, 행정정보체계론, 전자정부론, 조직이론, 인사행정론, 기획이론 등 기술과 행정을 연계시키는 분야의 연구와 강의를 하였으며, 1993년 8월 박사학위(논문: 지방정부 행정정보체제의 발전방안에 관한 연구)를 취득하였습니다. 석사학위 취득후 1984년부터 시작한 여러 대학교에서의 힘든 시간강사 시절, 그 이후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결혼을 하였고 이어서 아이들의 출생이 있었지만 기약이 없이 11년을 넘어서 언제까지 해야 할지 모를 불투명한 대학 강사로서의 생활을 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국가와 사회, 학문과 현실적인 삶에 관하며 깊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1994년 6월 대구광역시에서 박사급 전문직 공무원을 채용한다는 공고를 보고 공무원 채용시험에 지원하였습니다. 동년 9월 저는 대구광역시 전문직 공무원으로 채용되었으며, 국제통상실 이후 시정연구단에서 과학기술정책과 정보화부문, 지방정부의 개혁에 관한 이론연구와 정책개발 등 각종 개혁업무 추진을 주로 담당하였습니다. 1996년과 1997년 2차례에 걸쳐 과학기술처 관계자들과 합동 조사팀에 선발되어, 일본의 주요 도시 과학기술혁신 관련 기관을 거의 빠짐없이 답사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지역 과학기술정책 및 테크노파크 조성관련 정책수립에 참여하였습니다. 저는 기술혁신과 행정개혁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하였으며, 1997년 5월부터 시청내 Taskforce Team으로 구성된 시정정보화추진기획단에서 총괄조정 역할을 담당하면서 기존 행정을 정보화 기반으로 개혁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1999년 1월 그동안 추진해 온 시정 정보화 부문에 대한 노력과 능력을 평가받아 대구광역시 최초로 시장 직속의 정보화담당관으로 임명되었고, 2003년 1월 27일까지 만 4년간 대구광역시 정보화부문 최고책임자(CIO)로서 시정과 지역의 정보화 업무를 총괄하였습니다. 특히 저는 기존행정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깨끗하고 정직한 리더쉽과 사명감을 바탕으로 ‘대구를 디지털과 네트워크 기반에서 재창조 하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다양한 시책을 추진했습니다. 정말 어렵고 힘든 날을 보내기도 하고, 보람을 느끼는 날도 많았습니다. 아울러 정부와 행정부문의 개혁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인가를 온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였습니다. 실제 저는 새로운 전략과 많은 분들의 협조와 이해를 바탕으로 전국 16개 시·도 가운데 늘 하위 수준이던 대구시정의 정보화 부문을 2위 수준으로 향상시켰습니다(2000년 및 2001년 행정자치부 평가결과). 단기간에 저조한 PC보급률을 1인 1PC 수준으로 향상시켰으며, 네트워크(LAN)의 전면적인 확대 재구축, 주문형 정보화 교육 실시(컴퓨터 능력이 뛰어난 공공근로자를 활용하는 정보화 교육방식으로, 공무원 누구나 자신의 자리에서 2855(이쪽으로 빨리 오오)번호로 전화를 하면 아침부터 밤10시까지 찾아가서 1대1로 컴퓨터 활용방법을 교육하는 방식으로 전 공무원을 대상으로 하였음), 전 공무원 컴퓨터 활용 능력 실기평가, 시민정보화교육지원단 구성 운영(노트북을 활용하여 아파트 부녀회 및 입주자 대표회의와 협의하여 입주자회의실을 방문하여 정보사회의 도래와 컴퓨터 활용방법 및 유용성을 강의), 시청 전자결재 시스템 도입 운영 등 정보화 부문에서 획기적인 전환기를 마련하였습니다. 때로는 운수연수원(현, 대구시 교통교육연수원)을 방문하여 운전사(영업용 택시, 버스, 개인용달 등)를 대상으로 정보화 사회의 특성과 대응방안 그리고 대구의 발전을 위한 정보화 전략을 주제로 특강을 실시하기도 하였습니다. 운전사들에게 손님이 택시에 타면 ‘손님은 인터넷을 사용할 줄 아십니까?, 컴퓨터 공부를 해야 할까요?하고 질문을 해 주시기만 하여도 시민의 의식이 바뀔 수 있고, 시민의 의식이 바뀌면 대구는 발전할 수 있다고 하면서 기사분들의 정보화와 대구혁신에 동참을 호소하기도 하였습니다. 강의를 들었던 기사분들은 전자상거래의 확산과 정보화가 가져오는 다양한 변화의 물결을 사례를 통하여 인식을 하게 되었고 때로는 많은 질문과 함께 어떻게 해야 정보화 시대에 앞서갈 수 있는지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운수연수원, KT 등과 협조하여 현관 로비에는 쉬는 시간에 교육생들이 인터넷을 직접 활용해 볼 수 있도록 관련 시설을 갖추도록 하였습니다. 쉬는 시간이면 모두 밖으로 나와서 담배를 피우던 기사들이 인터넷을 활용하여 정보를 검색하고 많은 분들이 주위에서 인터넷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구경을 하는 등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이는 여론형성과 전파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운전사분들을 정보화에 동참하게 함으로써 실로 시민들의 정보화 마인드 확산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학생들의 정보화 마인드 및 활용역량 증진을 위하여 컴퓨터학원연합회와 협력하여 천여명이 넘는 학생들이 참여하는 컴퓨터경진대회를 공동으로 개최하고, 시장상을 전수하는 한편, 교육청을 통하여 대구시청 홈페이지 검색을 하여 과제물을 제출하도록 하고, 각 학교에는 특별히 제작한 책갈피(앞면에는 대구시청의 도메인, 뒤면에는 ’대구시청 이제 인터넷으로 오세요‘라는 구호가 인쇄된 책갈피)를 초중고교에 배부하고, 시내 서점에도 전달하여 책을 구입하는 분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함으로써 총력을 기울여 시민의 정보화 의식을 높이도록 하였습니다. 중소기업진흥공단과 중소기업청 그리고 지역 통신회사들과 협력하여 중소기업과 음식점, 숙박업소 등의 인터넷 활용기반 구축을 위하여 회의를 개최하고 다양한 시책을 추진하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컴퓨터학원 원장들을 시청에 초청하여 회의를 하고, 심지어 당시로서는 좋은 인프라를 갖추고 있지만 게임과 흡연 등 청소년 탈선장소로 인식되었던 PC방 주인들을 시청에 초청하여 잘 갖춘 정보 인프라를 시민정보화교육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습니다(당시 정보화 시책에 관심을 가지고 협조를 약속한 PC방 76곳을 무료 시민정보화교육장으로 선정하고, 지정 현판을 게시하였으며, 시청 홈페이지에 배너로 소개하고 신문과 방송을 통하여 홍보활동을 하는 한편, 공공근로자를 정보화 도우미로 파견하여 시민의 정보화 교육을 대대적으로 확산하였음). 시정 전반의 정보화 추진의 추진동력을 발휘하기 위하여 시장이 위원장으로 되어 있고, 정보화담당관이 간사로 되어 있으며 부교육감, 중소기업청장, KT본부장, 각 지역대학교 교수, 정보통신교육원장, 여성단체 대표 등 20여명으로 구성된 지역정보화추진위원회를 매월 개최하도록 하였으며, 이 위원회를 통하여 주요 의제 발굴, 추진전략 모색, 협력방안 도출 등 지역정보화 부문에서 최대의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아울러 시청내 매 간부회의 때 마다 정보화를 주요 이슈로 보고할 수 있도록 새로운 안건을 발굴하는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를 통하여 시장을 포함한 모든 간부들이 정보화에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힘을 보태어 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변화와 혁신은 수 많은 비판과 반대, 시기와 질투 그리고 때로는 엄청난 저항이 일어날 수 밖에 없기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혁신을 주도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신뢰를 바탕으로 한 지속적인 empowerment”를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였습니다. 역량을 발휘해 나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일 또한 그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 저는 꿈 속에서도 정보화를 추진하는 꿈을 꾸었을 정도로 저의 24시간은 정보화에 몰입해 있었던 기간이 였습니다. 그동안 연구해 온 선진국의 정보화 추진전략과 행정학 관련 지식을 연계시키면서 정보기술을 활용한 시정혁신을 과감하게 추진하였습니다. 1999년 6월 지방행정연수대회에서 '지방정부 BPR추진사례'를 발표하여 행정자치부 장관 표창을 수상한 바 있으며, 1999년 12월에는 『행정수준 한 단계 높이기 운동』 최우수 부서로 표창을 받았습니다. 1999년 7월 국가정보화의 중추기관인 한국전산원과 동아일보사가 공동으로 주최한 ‘정보화 수준 평가’에서 ‘전국최우수 CIO’로 선정되었으며, 그 이후 각급 기관과 정보화 관련 학회의 초청 강연과 세미나에 참여하여 정보화 추진전략과 관련된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2000년 2월 영남일보사로부터 ‘대구경북 뉴밀레니엄 리더’로 선정되었습니다. 정보화와 관련하여 좀더 폭넓은 시야를 갖기 위하여 2000년 4월-5월 미국 뉴욕주립대학교 '정보화 정책 및 전략 프로그램'을 이수한바 있으며, 2001년 5월-6월 호주 빅토리아 주정부 초청 전자정부 관련 연수에도 참여하였습니다. 2001년 7월에는 한국 지방정부 대표로 추천을 받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개최된 9th Regional Conference of the East and Southeast Asian Network for Better Local Governments 국제회의에 참여하여 영어로 동남아 개발도상국가의 시장과 주지사를 대상으로 전자정부 구현 경험과 과제를 발표하고 토론을 하였습니다. CIO로서 시정 정보화 시책추진과 병행하여 지역정보화의 기반이 되는 지역 소프트웨어산업육성을 위한 '대구소프트웨어비즈니스타운' 조성사업 기획 추진, (재단법인)대구디지털산업진흥원 설립 및 이사로 활동, (사단법인)영남여성정보문화센터 자문위원, 대구경북전자상거래지원센터(ECRC) 전문위원, 한국행정학회 섭외위원, 한국정부학회 이사, 한국지리정보학회 연구이사, 기술혁신학회 회원, 한국지역정보화학회 회원 등 각종 학회 활동에도 적극 참여해 왔습니다. 저는 1990년대 중반부터 “우리는 인터넷이 모든 것을 바꿔 버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Internet change everything!)”.는 것을 주문처럼 이야기 하며 살아 왔습니다. 기존의 정치체제, 금융질서, 상거래 방식, 교육제도와 방식 등 모든 분야는 디지털 기술을 바탕으로 새롭게 틀이 짜여지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모두는 각자의 능력계발을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하였으며, 저 스스로도 이를 생활에서 실천하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저는 2003년 1월 18일 그동안 전자정부 구현과 지역정보화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습니다. 저는 국가사회 전반을 디지털 기반에서 재구축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획과 전략개발이 무엇보다 시급하며, 이와 관련하여 좀 더 과감하고 체계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일은 정말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현실에 만족하기보다는 어렵고 힘드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 일이 의미 있는 일이라면 앞장서 개척해 나가는 자세로 생활하였습니다. 새롭고 의미 있는 일에 도전하는 것은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인류에 있어서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에 의하여 창출되는 가상공간(사이버스페이스)은 과거와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생활공간으로 자리 매김하였습니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인구의 급증으로 과거 인간활동에 가장 커다란 장애요소로 고려되었던 시간과 공간의 장벽이 무너지고, 심지어 언어의 장벽도 낮아지면서 기존의 물리적 공간에서의 삶과 사이버 공간에서의 삶을 융합시키는 차원에서 유비쿼터스(Ubiquitous) 혁명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Any time, Any Where, Any Device to the Network !는 유비쿼터스 혁명의 요체이며, 새로운 인터넷 주소체계인 IPv6기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저는 8년 5개월간 대구광역시 공무원으로서 이러한 변화에 능동적인 자세로 '미래의 대구'를 만들어 나가는데 동참하였으며, 틈틈이 세계화 추세에 발맞추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학습을 꾸준히 하고, 한국행정학회, 한국정부학회, 한국지역정보화학회, 지방자치학회 등 관련 학회활동과 대구IT포럼 회장, 대경CIO협의회 부회장 등 다양한 사회적 활동을 하였습니다. 2003년 1월 대구시청에서의 근무를 마치고, 3월 2일부터 대구대학교 행정대학에서 '전자정부론' 강의(행정학과 4학년)를 담당하였습니다. 몇 년간 중단하였다가 다시 시작한 한 학기 동안의 독서와 강의 그리고 휴식은 저 삶에 있어서 재충전을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대학교 강의후 교수 휴게실에서 우연히 접하게 된 전자정부국장 공개 채용 공고를 보고 용기를 내어서 지원하게 되었으며, 마지막 단계에서 4대1의 경쟁을 거친후 최종 합격자로 선정되어 저는 2003년 7월 16일부터 2007년 7월까지 '대통령 직속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전자정부/기록관리국장으로 재직하게 되었습니다. 정부혁신위원회에서의 일을 하면서 느낀 것은 지방정부에서 보았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예산과 사업의 내용과 만나는 사람들의 수준은 저의 안목을 키우는데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는 점입니다. 수 많은 전문가들을 만날 수 있었고, 우수한 산하기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으며,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되는 권력의 힘과 관심 그리고 열정을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이제는 고인이 된 서삼영 NIA 원장님의 전문성과 훌륭한 인품, 그리고 김병준 정부혁신위원장님의 추진력과 공직자로서의 자세, 함께 일하였던 동료 국장님들과 과장님 등 많은 동료들의 뛰어난 역량은 저에게는 늘 든든한 힘이 되어 주었고, 저 자신을 키워나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주로 범정부적 차원에서 전자정부를 통하여 '정부의 일하는 방식 혁신,' '대국민/대기업에 대한 서비스 혁신,' '정보자원관리 혁신,' '전자정부 관련 법제정비,' 등 4대분야, 10대 아젠다, 31대 로드맵 과제 그리고 국가기록관리혁신과 관련된 분야를 담당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세계 최고 수준의 한국 전자정부를 만들어 나가는 핵심 사업이 되었습니다. 정부는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조직입니다. 따라서 정부의 모든 활동과정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이를 공개하며, 보존하는 것은 국민과 역사에 대하여 '책임 있는 정부'로 발전해 나가는 핵심요소라고 생각합니다. 노무현 정부는 '기록이 없으면 정부가 없다'는 슬로건 아래 국가기록관리혁신을 비중 있게 그리고 다양하게 추진하였으며, 저는 이를 적극 뒷받침하였습니다. 이 분야에 있어서 한국의 성과는 세계적으로도 괄목할 만한 수준으로 나타났습니다. 2004년 12월, 그리고 2005년 12월 UN은 한국의 전자정부를 '세계 5위 수준'으로 평가하였고, 미국의 브라운대학교는 세계1위로 평가하였으며, 기타 다양한 국제적 평가에 있어서도 한국의 수준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국내외적인 평가를 기반으로 한국이 국제협력을 증진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였습니다. 전자정부를 통한 국제협력은 한국이 국제사회에서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서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의 진정한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며, 과거 한국이 어려운 시절 국제적으로 많은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아서 오늘날의 성과를 가지게 된 점을 고려할 때, 마땅한 조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007년 7월에는 4년 1개월간 근무한 정부혁신위원회 전자정부국장직을 사임하고, 남미 콜럼비아 정보화마스터플랜 수립을 위한 타당도 조사 사업의 전문가로 참여하였으며(KOICA), 귀국후 7월 25일부터 10월 31일까지 베트남 정부의 정보화 및 전자정부 정책자문관으로 파견근무를 하였습니다(KADO). 베트남 정통부에서 자문관으로 근무하던 중 10월 19일 저는 한국 전자정부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포장'을 전수 받았습니다. 2007년 11월 1일 귀국후 11월 9일부터 12월 21일까지 저는 다시 아프리카 대륙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이집트의 전자정부 발전을 위하여 이집트 정부의 최고 공무원교육기관인 LMDC(Leadership and Management Development Center)에 파견을 나가서 전자정부 전략과 사업기획, 프로젝트관리 등에 관하여 강의와 세미나를 주관하였습니다(KOICA). 당시 국내적으로는 대통령 선거전으로 어수선 하였지만, 저는 불필요한 정치적 상황에 얽매이지 않고, 한국 전자정부의 세계화를 위해서 더욱 의미 있고 갚진 시간을 보내고자 선택한 길이였습니다. 저는 전자정부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국제협력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추진해 온 한국의 전자정부 정책과 사업을 좀 더 객관적인 입장에서 다시 한번 생각하고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아울러 개인적으로도 이제까지 살아 온 저의 삶을 되돌아 보았고, 미래를 새로운 시각에서 설계할 수 있었습니다. 해외 전자정부 자문관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여 상당한 고민 끝에 2008년 1월 10일 저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서 전자정부 분야 해외 전문 컨설팅 기업인 (주)이거브컨설팅(eGOVconsulting Co. Ltd.)을 창업하여 대표이사로 취임을 하였습니다. 오랜 학계에서의 경험과 공직경험 그리고 해외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길과는 어떤 의미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길이고, 실로 생각했던 것보다 다양하고 많은 어려움도 겪었습니다. 창업후 첫 번째 사업으로 2008년 7월-8월 KOICA의 베트남 전자정부 연수과정을 총괄기획하여 베트남 각 부처에서 참여한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전자정부 강의를 진행하였으며, 이어서 콩고민주공화국 차관8명, 2차로 실무자 10명, 가봉 외교부 공무원, 네팔 전자정부 관계 공무원, 세르비아 공무원 등을 대상으로 전자정부 강의를 하였습니다. 2008년 12월-2009년 3월까지 중동 아프리카지역 전자정부 협력방안을 연구하기 위하여 두바이, 쿠웨이트, 이집트를 방문한 후 보고서를 내었으며, 2009년 3월부터 6월까지 키르기즈스탄 전자정부 마스터 플랜 수립사업의 PM(Project Manager)으로서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2009년 11월 콜럼비아 전자정부 연수과정을 총괄하여 각 부처에서 참여한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전자정부 강의를 2주간 진행하였으며, 이어서 KOICA 전자정부 전문가로 위촉을 받아서 파라과이 대통령실 전자정부 자문관으로 2010년 2월 18일까지 파라과이 아순시온에서 근무를 하였습니다. '남미의 심장'이라 불리우는 파라과이에서의 3개월은 성장잠재력이 풍부한 남미를 공부하고, 새로운 인적 네트웍을 구축하였으며, 더 넓은 중남미 세계로의 안목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저는 지난 2년간 공직자 출신으로서 창업을 하여 사업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몸소 체험하였으며,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으로 무척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울러 치열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정말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정말 소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음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는 분명 저의 인생에 있어서 더 넓은 지평을 열어 준 것이며, 매우 가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2010년 5월 1일 저는 공개모집 절차를 거쳐 문광부 산하기관인 한국문화정보센터(현, 한국문화정보원) 소장(원장)으로 임명되었으며, 2012년 2월 3일 임기 만료시까지 문화체육관광부와 산하 유관기관의 정보화 촉진, 전통문양 DB구축, 문화PD사업 추진, 문화포털 운영, 문화정보 캠퍼스 구축과 정보화 교육 프로그램 운영, Data Center 운영(가상화 기술 도입), 문화체육관광 통계 지표체계 선진화 및 통계 서비스 혁신, 문화체육관광 사이버안전센터 전담지원기관 운영 등 주요 사업을 추진하면서, 직원들의 복지증진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저희 기관은 2년 연속 경영평가에서 우수기관으로 평가를 받았습니다. 저는 기관의 책임자로서 조직의 장기적인 발전 기반을 구축하기 위하여 센터 발전 마스터 플랜을 Rolling Plan으로 수립하여 운영하였으며, 조직과 인력의 확대, 예산과 기능의 확대, 운영의 내실화 및 센터의 대외적 위상제고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센터 발전에 힘쓰면서도 바쁜 시간을 할애하여 KOICA, NIPA, NIA 등 정부산하 기관과 AfDB, IADB, World Bank, UNDP 등 국제기구와 협력하여 전자정부 및 ICT 관련 국제협력 프로그램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2012년 2년간의 문광부 산하기관장을 마친후 ㈜이거브컨설팅 회사로 복귀하여 필리핀 전자정부 마스터 플랜 수립 과제의 PM을 맡아서 수행하였으며, 베트남 전자문서 FS(타당성 조사) 과제도 수행하였습니다. 하반기에는 KOICA 과제인 아프리카 나이지리아(Nigeria) 전자정부 역량강화 사업의 BDS(Basic Design Study) 과제의 PM을 맡아서 수행하는 등 아프리카 지역 국가들의 전자정부 분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2013년 4월 저는 지인의 추천으로 ‘LX 대한지적공사(현, 한국국토정보공사) 공간정보연구원장’ 공모에 참여하였으며, 공간정보 분야의 R&D 추진, 토지정보 분야의 선진화, 그리고 토지정보 및 공간정보 분야의 세계시장 진출을 주요한 과제로 안고 5월 1일 원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LX 공간정보연구원장으로 근무를 하면서 LX 역시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특히 중요한 환경적 변화로서는 대한지적공사의 사명이 한국국토정보공사로 바뀌었고, 37년의 역사를 일구어 온 여의도 시대를 마감하고 전주에 위치한 전북혁신도시로 이전을 하였으며, 급속하게 부각되는 업계와의 측량분야 업역 재조정 및 시장개방 관련 갈등, 공공기관의 임금피크제 도입과 관련한 노사간 갈등, 공간정보연구원의 여의도 존치 여부, 여의도 사옥 매각, 공간정보아카데미의 조직 및 기능을 국토정보교육원으로 이관, 글로벌사업처의 전주 혁신도시로 이전과 본사로의 소속 변경 등은 특히 대응하기 힘든 과제였습니다. 그러함에도 저는 원장으로서 3년간 실로 적지 않은 의미 있는 변화와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국가로부터 5년간 200억원이 넘는 지원을 받게 되는 공간정보오픈플랫폼연구단 운영사업을 성공적으로 유치하였고, 공간정보 분야 인력양성 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공간정보아카데미의 개설과 성공적인 운영, 국제협력부를 연구원에 소속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LX의 글로벌 비즈니스의 기반조성, 네티즌과 연구원간 개방적이고 상호작용이 용이하도록 연구원 홈페이지의 획기적 개편, 3번에 걸친 스마트엑스포 행사의 차질 없는 개최, 유관 학회들과의 유기적 협력을 통한 다양한 행사 개최, 공간정보 분야 전문가들의 정보공유와 교류 소통의 채널로서 공간정보매거진 창간 및 지속적 발간, 연구원의 지적 활동 산물인 연구보고서의 질적 개선, 연구원 발간 학술지의 학술진흥재단 등재지로의 승격, 연구자문 및 심사위원의 참여폭을 다원화하고 전문성 높은 분들의 참여기회 확대, 자율주행자동차 연구과제와 지적 재조사기본계획 수립과제, KLIS의 고도화 과제 등 수 많은 국책과제의 수주와 성공적인 수행, 공간정보 표준협력기관 지정 등 많은 의미 있는 성과를 달성하였습니다. 더구나 이러한 수 많은 일들과 활동들을 연구원의 급격한 환경 변화 속에서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3년간의 원장 재임기간 동안 연구원은 2번에 걸쳐 이사를 하여야 했고, 연구원의 모체인 공사의 사명이 한국국토정보공사로 바뀌었고, 이는 단순히 이름의 변화가 아니라 기능과 역할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더욱이 연구원의 보금자리가 종국적으로는 서울에서 전주 전북혁신도시로 이전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공사 CEO의 교체, 부사장 3회, 감사 3회, 연구원 연구기획실장 4회 등 주요 협력 파트너가 모두 원장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수차례 교체되는 등 환경적 변화는 제가 업무를 추진함에 있어서 극복해야 할 가장 큰 어려움들이였습니다. 저는 연구원의 생명은 다양성과 창의성을 존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확신합니다. 다양한 생각의 차이를 존중하면서도 조화와 협력을 이루어 나가야 하기에 늘 ‘尊異求同 以聽得心(존이구동 이청득심 : 다름을 존중하고 조화를 추구하며, 들음을 통하여 마음을 얻어라)’이라는 격언을 원장실에 걸어두고 스스로를 가다듬고자 하였습니다. 저는 LX 공간정보연구원은 “국가 공간정보 R&D를 선도하는 글로벌 HUB 연구기관”으로 발전해 가기를 희망하며, 앞으로도 적극 협력을 해 나갈 것입니다. 특히 IT와 결합된 한국 공간정보기술과 노하우, 다양한 경험들을 세계 시장에 진출 시키고 이를 통하여 국내 관련 산업의 육성은 물론 많은 개도국의 국가발전에도 기여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2016년 4월말, 연구원장으로서 임기를 마치고 저는 NIPA과제로 수행된 ’Feasibility Study of Tunisia Smart City in El-Ghazala’ 과제에 참여하는 한편, 여유 시간에는 한국행정학회 행정사연구회와 행정철학 및 방법론 연구회에 참여하여 지적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는 한편, 체력관리를 위해 매일 1시간이상의 시간을 투자하였습니다. 2016년 9월부터는 국민대학교 BIT전문대학원 겸임교수로 발령을 받아 석·박사학위과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Global Trends of e-Government’과목을 강의하며, 기타 시간에는 국내외 정보화 및 전자정부 분야에 관한 자문과 특강 등을 하였고, 특히 앞서 시작한 튀니지 과제에도 참여하면서 한국의 스마트 시티를 포함한 다양한 ICT 관련 요소기술의 해외진출이 시급하고, 이를 위해서 국가적 차원에서의 많은 협력과 민간부문의 새로운 해외 진출 전략이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2016년 11월 저는 대구디지털산업진흥원(DIP) 원장직 공모에 지원하였고, 10대 1의 경쟁을 거쳐 12월 1일 원장으로 취임하여 새로운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ICT를 기반으로 지역의 경제와 산업을 혁신하고, 시민이 더 안전하며 쾌적한 삶의 환경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디지털 기반의 대구 재창조’라는 큰 그림을 구현해 나가고 있습니다. 특히 지역의 IT산업과 문화컨텐츠 산업 육성 그리고 대구의 스마트 시티 구축을 위한 PMO(Project Management Office)로서의 역할은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DIP 원장 취임 후 기본적 운영비가 지원되지 않은 상황에서 수탁과제에 의존하여 기관을 운영하는 것은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측면에서 한계를 느꼈습니다. 특히 대부분의 정부발주 과제들을 수탁해서 수행해야 하는 산하기관의 경우 기업들과는 달리 간접비를 아예 인정해 주지 않거나 극히 소액의 금액을 편성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유로 인하여 DIP와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는 전국의 진흥기관들이 기본운영비를 몇 십억원의 예산을 지원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DIP에 대한 운영비 지원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과거와 달라진 상황을 이해시키고 동의를 받기에는 너무나 힘든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재정적 상황과 원장 취임 후 중점 과제로 수행하려던 스마트 시티 PMO 기능을 몇 가지 사유로 효율적인 추진체제로 발족을 하지 못하고 천금같은 시간을 1년반이나 지나게 되었습니다. 국책과제 수행에 지방정부가 분담해야 할 분담금 조차 이런 저런 사유로 결국 DIP가 은행 차입을 통하여 해결하여야 했고, 과제를 많이 수주하여 수행할수록 발생하는 간접비 부담은 증가하는 등 악순환은 계속되어 3월부터는 급여 부족분을 해결하기 위하여 추가적인 은행차입을 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주무기관으로부터 강한 재정자립과 자구책 마련을 요구 받고, 원장부터 경비 절감을 위하여 업무용 차량을 반납하고, 업무추진용으로 지급된 법인 신용카드와 휴대폰을 반납하였으며, 출장비와 업무추진은 개인이 부담하는 등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며 기관의 신뢰회복을 위한 임직원들의 동참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본 운영비가 없는 상황에서 경비절감을 통한 노력은 마치 ‘마른 수건을 쥐어짜는 것’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결국 원장으로서 직원 전체회의를 소집하고, 위기 극복을 위한 적실성 있는 방안을 직원들 스스로 마련하여 제출해 주고, 그 내용이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없는 방안이라면 원장으로서도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판단되어 주무기관에 거취를 표명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근로자 대표들이 작성하여 가져온 방안은 자신들의 고통분담과 신뢰회복에 관한 내용은 거의 없고, 원장의 급여 전액 삭감을 제안하는 등 그 방안으로서는 현실의 문제를 풀 수 없는 방안이었습니다. ‘生卽死 死卽生(얕은 생각으로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고, 죽을 각오로 혁신을 한다면 살 수 있다) 精神’을 임직원들에게 호소하며 고통분담과 회생의지의 표명을 기대하였던 원장으로서는 실망의 수준을 넘어서 배신감을 느낄 수준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관장으로 자리에 연연하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에서 주무기관을 방문하여 4월 중순에 사임의 의사를 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무기관에서는 임박한 지방선거를 의식하여 사표제출을 보류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저로서는 이미 사임을 결심한 바이기에 당장 사표를 내고 수리를 요청하고 싶었지만, 여러 가지 인간적 상황을 고려할 때 사표제출을 보류하는 것이 임명권자를 비롯한 관계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를 지키는 것이라 판단되어 일단 사표제출은 보류하지만 원장 신상과 관련해서는 다른 대안을 찾는 노력을 시작하겠다는 의견을 피력하였습니다. 2018년 5월 저는 한국국토정보공사를 방문하여 사장직 공모에 원서를 접수하였으며, 그 이후 서류전형과 임원추천위원회 면접 등 여러 검증 절차와 추가적인 자료제출을 하였고, 2018년 7월 23일자로 임명권자인 대통령으로부터 LX 한국국토정보공사 제19대 사장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LX 공간정보연구원장으로 3년간 근무하고, 2년 3개월의 공백기를 거쳐 다시 LX에서 일하게 된 것은 나름대로 큰 의미가 있으며 전환기에 있는 LX의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고, LX의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촉진하며, 공사로서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의 수행, 그리고 내부 운영에 있어서 합리성과 공정성을 구현하고, 일과 삶의 균형된(Work & Life Balanced) LX를 만들어 나가는 것을 제가 중점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시간을 아껴가며 나름대로 모든 역량을 투입하여 공사의 혁신을 주도했으나, 임기 중반에 지역연고 기반의 참으로 형편없고 파렴치한 정치 모리배들의 중상 모략으로 엄청난 시련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힘든 과정을 직접 거치면서 대한민국이 이렇게 허술하고 부도덕하며 무책임한 사람들에 의하여 국정이 관리되고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어렵고 힘든 법적 절차를 거쳐서 저는 사장직에 복직을 하였고, 2021년 7월 22일 저는 당초 사장 임기 3년을 마쳤습니다. 앞으로 좀 더 거시적으로 제가 관심을 가지고 하고 싶은 일은 '대한민국 정부'가 정보기술을 기반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스마트한 정부'로 발전할 수 있도록 기여하는 것이며, 이러한 저의 국내외적 경험을 세계와 공유함으로써 인류의 보편적 가치 구현에도 기여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기회가 부여된다면, 현재 위기를 겪고 있는 대학의 혁신을 위해서 오랜 기간 동안 나름대로 고민해 온 바를 구현하고 싶습니다. 많은 분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큰 뜻을 가지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늘 열린 마음으로 여러분의 방문을 환영하며, 여러분의 많은 조언과 지도편달을 부탁드립니다.

최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