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족은 어렵고 힘든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 일이 의미 있는 일이라면 늘 앞장서 개척해 나가는 자세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항상 새롭고 의미 있는 일에 도전하면서 '志鐵心鏡(의지는 강철과 같이 굳세고, 마음은 거울과 같이 맑게 하라)'이란 가훈을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아울러 생전에 아버지께서 자주 인용하시던 "배움의 길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아서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그 뜻을 이룰 수 없다"는 유지를 받들어 가족 모두 늘 자신을 연마하고 공부하는 ‘배움의 자세’를 갖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1919년 경북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에서 10남매의 9번째로 태어나셨다고 합니다. 젊은 시절 배움에 목말라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공부를 하셨고, 이후 일본과 만주로 다니시면서 배움과 국가독립 그리고 농촌 계몽운동 등 많은 활동을 하셨으며, 우리나라 농업협동조합 설립에 참여하셨다고 합니다. 이후 농업협동조합장으로서 그리고 지역사회 지도자로서 활동을 하셨고, 늘 할머니에 대한 지극한 정성은 어린 시절 저에게 큰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강인한 정신력과 일에 대한 추진력, 반듯한 일 처리 자세 그리고 엄격하면서도 따뜻한 인간미는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1980년 제가 대학교 3학년때 지병으로 62세에 소천하셨지만 외동아들인 저를 강인하게 키워주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1921년 경북 예천군 보문면 고평리에서 경주 김씨 집안의 장녀로 태어나셨습니다. 어려서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많은 고생을 하신후 16세에 저희 집으로 시집을 오셨다고 합니다. 아버님께서 10남매 가운데 아홉번째였기 때문에 가난한 시골 생활에 많은 고생을 하셨답니다. 황폐한 6. 25동란을 거치면서 딸 여섯, 아들 하나인 저희 7남매를 기르시느라 많은 고생을 하셨으며, 10년이 넘게 병환에 계시던 아버님께서 1980년에 세상을 떠나신 후 제가 박사학위를 취득하기까지 눈물과 인내로서 저에게 힘이 되어주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2013년 4월 16일 93세를 일기로 사랑하는 가족 1남 6녀, 24명의 손자/손녀를 남기고 영면에 드셨습니다.
저의 인생의 동반자인 아내는 1남 3녀의 장녀로 태어나서 대학교 유아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대학교 부설 유치원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중 26세에 저의 선배님의 소개로 당시 행정학과에서 강의를 하고 있던 저와 만나게 되었으며, 1988년 10월 3일 하늘이 열린 개천절에 대구 귀빈예식장에서 결혼하였습니다. 그동안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둘리유치원 원장, 개나리유치원 원장을 역임하였으며, 대구대, 대구가톨릭대, 경운대, 경동정보대, 대구미래대, 대신대 등 지역 대학에서 강사와 겸임교수로 출강을 하였습니다. 2005년 2월 경북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과정(아동가족학 전공)을 수료하였고, 2006년부터 2012년까지 대구보육정보센터 소장으로 재직하였으며,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세명의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직장인으로서 책임과 역할을 다하기 위하여 늘 바쁜 나날을 보내왔습니다. 특히, 2011년 봄, 어머님께서 입원하신 이후 2013년 4월 어머니께서 별세하실 때까지 병원과 직장 그리고 집을 다니면서 정말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2013년 가족들이 서울에 이사를 하면서 새로운 직장을 가지게 되었고, 나름대로 열심히 사회와 가정을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아내가 늘 건강하게 자신의 일터와 가정에서 보람과 행복이 늘 함께 하길 바라며, 남편으로서 최대한 협력하려고 노력중입니다. 딸은 2012년 대학교 일본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친구들을 잘 사귀면서 공부도 성실하게 해 왔습니다. 특히 집에 오면 직장생활로 힘든 엄마를 도와 집안 일도 척척해 내면서, 늘 두 동생들의 든든한 누나로서 모범을 보이려고 노력했습니다. 대학생 시절 동아리 활동과 아르바이트 등 사회를 배우려고 스스로 다양한 노력을 하였으며, 자신의 용돈은 스스로 마련하여 왔습니다. 일본어와 일본문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였으며, 근검절약 정신과 원만한 성격으로 두루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누구보다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났으며, 할머니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여 2011년 4월 할머니께서 병원에 입원하여 2013년 4월 할머니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집과 학교를 오가며 정성을 다하여 할머니를 돌보아드리는 모습을 보며 병원에 계시는 분들은 물론 주위에서 많은 분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2014년 1년간의 일본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서울에 소재한 무역회사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2020년 12월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였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장남은 2015년 군복무를 마치고 마치고 대학에 복학하여 2019년 2월 식물환경신소재공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본인이 희망하는 회사에 취직을 하여 근무중입니다. 명섭이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무던하고, 운동도 좋아하였으며, 성실성과 자기관리에 있어서 철저한 편이였습니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롤러블레이드 타기, 자전거 타기 그리고 컴퓨터 게임을 즐겨 하였으며, 중학교부터는 농구와 컴퓨터 게임을 많이 했습니다. 고등학생이 된 이후에는 학원에 다니는 것을 중지하고, 인터넷을 활용하여 스스로 공부를 하였습니다. 수학과 과학과목을 특히 좋아하여 대학수능에서는 만점을 받았지만, 대학입시에 실패하여 1년간 재수라는 인생의 쓴 맛을 보면서 더욱 정신적으로 성숙한 모습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늘 동생 명현에게는 가장 든든한 후원자로서 역할도 잘 하고 있습니다. 차남은 2017년 군에 입대하여 2019년 군복무를 마쳤습니다. 어려서부터 음식은 무엇이든 잘 먹고 잠도 잘 잤으며, 잘 웃었습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친구들과 잘 지내고 있으며, 롤러블레이드와 자전거 타기를 잘 하고, 컴퓨터를 무척 좋아하고, 농구를 즐겨 하였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을 활용하여 관련 사이트를 찾아서 스스로 공부를 잘 해 왔습니다. 어릴 때부터 가끔씩 어른스럽고 상당히 수준 있는 말을 잘 해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중학생 때부터는 더욱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며, 바쁜 엄마를 가장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부터는 학교 필드 하키팀 선수로 선발되어 열심히 활동하였고, 대구시 대표선수로도 활동을 하였습니다. 운동을 통하여 중학교 1학년까지 심각한 수준이었던 비만문제와 건강문제를 무리 없이 잘 해결 하였으며, 키도 훌쩍 커서 2011년 드디어 아빠 키를 능가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할머니께서 병원에 계시는 동안 매주 주말이면 시간을 내어서 할머니를 방문하여 즐겁게 해 드리는 모습을 볼 때 참 자랑스러웠습니다. 중3때 장래 진로와 관련하여 많은 고민을 하였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운동선수 생활을 그만두었습니다. 자신의 진로와 관련해서도 나름대로 명확한 목표를 설정하고, 심리적으로도 안정감과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2013년 2학기 서울로 전학을 하여 서울생활에 잘 적응을 하였고, 주말에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스스로 자립심을 키워 왔으며, 언제 어디에서나 책임감 강한 든든한 청년입니다. 차남은 현재 직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아빠로서 좋은 책을 많이 읽고, 세상을 균형 있게 바라보고 살아가길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가족 모두가 각자의 일로 인하여 바쁘고,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눌 시간이 부족하지만, 수년전 카카오톡 가족 그룹 대화방을 개설하고 이를 통하여 수시로 각자의 생각을 공유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행복한 가정과 자기의 꿈을 가꾸어 가고 있습니다.